너무나 위험한 도박과 파스칼의 내기
블레즈 파스칼 초상, 1670년, 작자 미상
독이 든 물 한 잔 앞에서
- 도무지 믿기지 않는 경고라면 그냥 무시해도 괜찮을까?
- 가능성이 낮아 보여도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경우는 언제인가?
- 이 원리가 왜 신앙의 문제에도 똑같이 적용되는가?
여러분이 식당에서 물을 마시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이 다가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선생님, 그 물에는 치명적인 독약이 섞여 있습니다. 절대로 마시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웃어넘기고 벌컥벌컥 마시겠습니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 사람의 말이 아무리 믿기지 않아도, 여러분은 함부로 그 물을 마시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말이 사실로 판명되는 순간, 여러분은 그 말을 진지하게 따져 보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죽음’이라는 너무나 끔찍한 결과를 맞게 되기 때문입니다. 경고가 사실일 가능성이 아주 낮아 보여도, 틀렸을 때 치르는 대가가 목숨이라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지요.
우리는 사실 이런 판단을 매일 하며 살아갑니다. 집에 들어섰는데 가스 냄새가 나면, 십중팔구 착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창문을 열고 밸브부터 확인합니다. 건물에 화재경보가 울리면, 오작동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단으로 걸어 나갑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우리 속담은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지요.
이 상식적인 판단에는 두 가지 기준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는 그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일이 일어났을 때의 ‘결과의 크기’입니다. 결과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이라면,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는 사실만으로는 확인을 건너뛸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그 반대로 가능성이 낮을수록 더 꼼꼼하게 확인해 보는 것이 합리적인 셈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독이 든 물은 아무리 끔찍해도 결국 ‘끝’이 있습니다. 독약을 마신 사람은 몇 분, 길어야 몇 시간 고통스러워하다가 숨을 거두고, 그것으로 고통도 끝나지요. 제가 지금부터 말씀드리려는 경고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고통이 끝나지 않는 곳,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곳에 대한 경고입니다. 독이 든 물 한 잔에도 그토록 조심하는 우리가, 끝이 없는 고통에 대한 경고는 확인조차 하지 않고 웃어넘겨도 괜찮을까요?

저는 지금부터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 문제는 여러분의 선택에 따라 ‘영원한 생명’이냐, 아니면 지옥의 유황불 속에서 영원히 불타며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영원한 형벌’이냐가 갈리는 문제입니다.
그 문제란 바로 이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받는 심판의 시작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심판 뒤에는 오직 두 길만 남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기쁨을 누리는 천국이고, 다른 하나는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는 지옥입니다. 두 길을 가르는 기준은 얼마나 착하게 살았느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느냐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은 죽음 뒤에 영원한 지옥의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처음 듣는 분에게는 거북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불편한 진실’이겠지요. 이 진실을 왜 사실로 볼 수 있는지는 다음 편에서 성경과 근거를 앞에 놓고 자세히 따져 보겠습니다. 다만 여기서는 한 가지만 여쭙고 싶습니다. 만에 하나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래도 확인조차 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시겠습니까?
17세기 프랑스의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은 이 상황을 이렇게 한 줄로 정리했습니다 [1].
우리와 천국 또는 지옥 사이에는 오직 생명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인데,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것이다. (『팡세』, 브랑슈비크 판 213번)
이 문장을 남긴 파스칼은 서른아홉 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2]. 그렇다면 얼핏 아무리 황당하게 들리고 믿기지 않더라도, 이 경고가 정말 사실인지 한 번쯤은 진지하게 따져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틀렸을 때 치르는 대가가 끝없는 불 속의 고통이라면, 이것은 그냥 흘려듣고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도박이지 않습니까?
믿든 안 믿든 내 자유라는 생각
- 종교는 그저 개인의 취향일 뿐인가?
- 판단을 미루고 있으면 중립을 지키는 것인가?
- 파스칼은 이 문제에 무관심한 사람을 어떻게 보았는가?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여러분 중에는 이런 반응을 보이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믿든 안 믿든 그건 내 자유 아닌가? 종교는 각자 취향대로 고르는 거지. 나는 그냥 관심이 없을 뿐이고, 남한테 피해 주는 것도 아닌데 왜 자꾸 따져 보라는 거야?
충분히 이해합니다. 실제로 믿을지 말지는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조차 사람에게 억지로 믿음을 집어넣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여기서 꼭 구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것과 ‘그 선택의 결과를 바꿀 자유’가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점이지요.
앞의 예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독이 든 물을 마실지 말지는 분명히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마시기로 선택했다고 해서 물속의 독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판단의 근거는 나의 ‘기호’가 아니라,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의 여부입니다. 물에 독이 있다면 내 취향과 상관없이 있는 것이고, 없다면 내 두려움과 상관없이 없는 것이지요.
종교를 ‘취향’으로만 보는 생각에도 바로 이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짜장면이냐 짬뽕이냐는 정말로 취향의 문제입니다. 어느 쪽을 골라도 틀린 사람은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계시는가’, ‘죽은 뒤에 심판이 있는가’는 짜장면과 짬뽕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계시거나 안 계시거나, 둘 중 하나만 참일 수 있는 사실의 문제입니다.
또 하나 짚어야 할 점은, 판단을 미루는 것도 사실은 하나의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내기를 거부하려는 사람에게 이렇게 답합니다. “그래도 걸어야 합니다. 이것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미 배에 올라탄 것입니다.” [1] 배가 이미 바다 위를 달리고 있는데 ‘나는 아무 데도 가지 않겠다’고 말해 봐야 소용이 없지요. 결정을 미루는 동안에도 배는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으니까요.

흥미롭게도 파스칼은 믿지 않는 사람을 두 부류로 뚜렷하게 나누었습니다. 한 부류는 의심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온 힘을 다해 답을 찾는 사람이고, 다른 한 부류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사는 사람입니다. 파스칼은 앞의 사람들에게는 깊은 동정을 보냈지만, 뒤의 사람들을 두고는 이렇게까지 말했습니다 [1].
자기 자신과 자신의 영원, 자신의 모든 것이 걸린 일에 이렇게 무심한 태도는, 나를 동정보다 분노로 이끈다. 그것은 나를 놀라게 하고 당황하게 하며, 나에게는 괴물 같은 일이다. (『팡세』, 브랑슈비크 판 194번)
파스칼은 이것이 신앙심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고 덧붙입니다. 오히려 ‘자기 이익’과 ‘자기 사랑’이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원리만으로도 이런 감정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1]. 자기 집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도 확인조차 하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쿨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무모하다고 하지요.
의심하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의심만 하고 확인하지 않는 것은 합리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이 글이 여러분께 부탁드리는 것도 무조건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이 문제를 ‘따져 볼 가치가 있는 문제’로 대해 달라는 것입니다.
수학자 파스칼과 내기의 탄생
- 파스칼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 왜 하필 수학자가 ‘내기’라는 방식으로 신앙을 이야기했을까?
- 『팡세』의 내기 단장은 어떤 글인가?
‘파스칼의 내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이 논증을 만든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파스칼은 감상적인 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당대 유럽에서 손꼽히는 수학자이자 과학자였지요.
파스칼은 1623년 6월 19일 프랑스 클레르몽(지금의 클레르몽페랑)에서 태어났습니다 [2]. 젊은 시절에 이미 기계식 계산기를 만들었는데, 이 계산기는 지금도 ‘파스칼린’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1654년 여름, 파스칼은 수학자 피에르 드 페르마(Pierre de Fermat)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노름에서 생기는 확률을 계산하는 문제’를 함께 풀었습니다 [2]. 과학철학자 이언 해킹(Ian Hacking)은 1975년 『The Emergence of Probability』에서 파스칼의 내기를 ‘의사결정 이론에 대한 최초의 잘 이해된 기여’라고 평가했습니다 [3][4].
다시 말해 파스칼은 ‘확률’과 ‘기대값’이라는 도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에 그 도구를 적용해 본 것이 바로 파스칼의 내기인 셈이지요.
같은 해 1654년 11월 23일 밤, 파스칼은 삶을 송두리째 바꾼 체험을 합니다. 그는 그 밤의 일을 종이에 적어 겉옷 안에 꿰매 두고 평생 지니고 다녔는데, 이 기록이 위 사진의 ‘메모리알’입니다 [2]. 이후 파스칼은 기독교가 참이라는 것을 변호하는 책을 쓰려고 메모를 모아 갔지만, 1662년 8월 19일 파리에서 서른아홉 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2]. 남은 메모는 1670년 『종교 및 기타 주제에 관한 파스칼 씨의 생각』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이것이 우리가 아는 『팡세』입니다 [2].
내기 이야기는 그 『팡세』 가운데 ‘무한―무(無)‘라는 제목이 붙은 단장에 들어 있습니다. 『팡세』는 판본마다 단장 번호가 다른데, 이 단장은 브랑슈비크(Brunschvicg) 판으로 233번, 라퓌마(Lafuma) 판으로 418번, 셀리에(Sellier) 판으로 680번입니다 [5].
파스칼은 이 단장에서 이렇게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이 계시든지, 안 계시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성만으로는 어느 쪽인지 단번에 결정할 수 없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무한히 먼 곳에서 동전 던지기가 벌어지고 있고, 앞면이 나올지 뒷면이 나올지 모르는 상황과 같다는 것이지요 [1]. 이제 여러분은 어느 쪽에 거시겠습니까?
기대값으로 따져 보는 네 가지 경우
- 기대값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일상에서 이것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
- 파스칼의 내기를 표로 그리면 어떤 모습이 되는가?
- 가능성이 아주 낮아도 결론이 달라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대값’이라는 말이 어렵게 들리실 수 있으니 쉬운 예부터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동전을 던져서 앞면이 나오면 3만 원을 주고, 뒷면이 나오면 1만 원을 받겠다고 제안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내기에 응하는 것이 이득일까요, 손해일까요?
계산은 간단합니다. 각 경우의 ‘확률’에 그때의 ‘결과’를 곱해서 더하면 됩니다. 앞면이 나올 확률 2분의 1에 3만 원을 곱하면 1만 5천 원이고, 뒷면이 나올 확률 2분의 1에 1만 원 손실을 곱하면 5천 원 손실입니다. 둘을 합하면 한 판에 평균 1만 원을 버는 셈이지요. 이것이 ‘기대값’입니다. 확률이 반반이어도, 얻을 것이 잃을 것보다 크면 거는 쪽이 합리적이라는 것이지요.
파스칼도 바로 이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갑니다. 이기면 목숨 하나를 걸고 목숨 둘을 얻는 내기라면 걸어 볼 만하고, 목숨 셋을 얻는 내기라면 걸지 않는 쪽이 오히려 어리석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내기에 걸린 것은 목숨 둘이나 셋이 아니라 ‘무한히 행복한 영원한 생명’이라고 파스칼은 말합니다 [1].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쪽에 걸었을 때의 이익과 손실을 저울질해 봅시다. 이기면 모든 것을 얻고, 져도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하나님이 계신다는 쪽에 거십시오. (『팡세』, 브랑슈비크 판 233번)
철학자들은 이 논리를 ‘하나님이 계신다·안 계신다’와 ‘믿는다·믿지 않는다’를 엇갈려 놓은 네 가지 경우로 따집니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의 「Pascal’s Wager」 항목을 쓴 앨런 하예크(Alan Hájek)도 같은 틀을 씁니다 [3]. 네 가지 경우를 표 하나로 정리하는 일은 성경이 무엇을 경고하는지 확인한 뒤로 미루고, 여기서는 먼저 계산하는 방법부터 보겠습니다.
이제 기대값을 계산해 볼까요? 믿는 쪽의 기대값은 ‘하나님이 계실 확률 × 무한한 생명’에 ‘안 계실 확률 × 작은 손실’을 더한 값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무한에 0이 아닌 어떤 확률을 곱해도 여전히 무한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계실 확률이 100분의 1이든 100만분의 1이든, 0만 아니라면 믿는 쪽의 기대값은 무한이 되지요 [3]. 반면 믿지 않는 쪽은 하나님이 안 계신다는 쪽에 맞혀도 손에 쥐는 것이 ‘작고 유한한 이득’뿐입니다. 그렇다면 믿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계신 경우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이 내기에서 가장 무거운 이 질문은 잠시 뒤 성경으로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물론 수학을 좀 아는 분이라면 이런 의문을 품으실 수 있습니다.
무한대를 곱하고 더하는 계산이 정말 말이 되나? 무한대를 집어넣으면 어떤 결론이든 다 만들어 낼 수 있는 거 아냐?
일리 있는 지적입니다. 실제로 하예크는 2003년 『The Philosophical Review』에 실은 「Waging War on Pascal’s Wager」에서, 무한대를 그대로 쓰면 ‘동전을 던져서 앞면이 나오면 믿겠다’는 식의 어정쩡한 전략까지 기대값이 무한이 되어 버린다는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6]. 반대로 폴 바사(Paul Bartha)는 2007년 『Synthese』에 실은 논문에서, 두 선택지의 효용을 ‘비율’로 비교하는 방식으로 무한대에서 생기는 이런 반론의 상당수에 답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3][7]. 2018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가 이 논증 하나만을 다룬 논문집까지 냈을 만큼, 이 논쟁은 지금도 학계에서 진지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8].
하지만 이 기술적인 논쟁이 결론을 뒤집지는 못합니다. 무한대가 마음에 걸린다면 아예 무한대를 빼고 아주 큰 유한한 숫자로 바꿔 계산해 보면 됩니다. 하나님이 계실 확률을 겨우 1%로 잡고, 얻을 것을 100만, 잃을 것을 100이라고 해 봅시다. 믿는 쪽의 기대값은 0.01 × 1,000,000 − 0.99 × 100 = 9,901이고, 믿지 않는 쪽은 그 반대로 −9,901입니다. 무한대를 쓰든 쓰지 않든, 걸린 것의 크기가 이렇게 차이 나는 한 결론의 방향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런데 ‘잃을 것이 없다’는 말은 과장 아닌가? 믿으면 주말도 교회에 바쳐야 하고, 하고 싶은 것도 참아야 하잖아.
이 지적도 정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파스칼 자신도 믿는 쪽에 걸면 ‘독이 든 쾌락’, 곧 헛된 명예와 사치를 내려놓게 된다고 인정했습니다 [1]. 그러나 그는 곧이어 그 대신 신실하고, 정직하고, 겸손하고, 감사할 줄 알고, 너그러운 사람이 된다고 덧붙였지요 [1].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William Lane Craig)도 2012년 독자 질문에 답하면서, 파스칼이 하나님이 안 계실 경우의 유한한 손실을 인정하고 있다고 짚었습니다 [9]. 결국 잃을 수 있는 것은 길어야 수십 년의 일부이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영원이라는 것이지요.
유황불 속 끝없는 고통의 지옥
- 이 내기에서 말하는 ‘신’은 어떤 신인가?
-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결과는 단지 ‘천국을 놓치는 것’에 그치는가?
- 성경은 지옥의 고통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경고하는가?
- ‘영원히’라는 말은 실제로 얼마나 긴 시간인가?
이제 앞에서 미뤄 둔 질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믿지 않는 쪽에 걸었는데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 사람에게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이 내기의 무게는 사실상 이 한 가지 경우에 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따지고 있는 신은 철학자들이 머릿속으로 그려 낸 막연한 ‘어떤 신’이 아닙니다. 파스칼이 무릎 꿇고 기도했던 그 하나님, 곧 성경의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이 칸에 무엇을 써야 하는지는 성경이 직접 말해 주어야 하겠지요? 그리고 성경의 대답은 결코 애매하지 않습니다.
먼저 성경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 자체가 가장 근본적인 죄라고 선언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세상을 책망하실 때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 16: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라고 하셨지요.
아무리 작은 죄도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 12:36)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사라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을 말씀하시며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 25:46)고 하셨습니다. 형벌과 생명에 똑같이 ‘영원’이라는 말이 붙어 있지요. 생명이 영원하다면, 형벌도 똑같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곳을 의식도 없이 꺼져 버리는 곳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지옥을 “꺼지지 않는 불”(막 9:43)이라고 부르셨고, 그곳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8)고 세 번이나 되풀이해 경고하셨습니다. 마지막 날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해 내리실 선고도 이미 말씀해 두셨지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
그곳에 던져진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은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 13:42)고 말씀하셨습니다. ‘울며 이를 간다’는 말은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절망과 후회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지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죽은 부자는 불꽃 가운데서 이렇게 애원합니다.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눅 16:24). 물 한 바가지도 아니고, 손가락 끝에 묻힌 물 한 방울조차 허락되지 않는 곳,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더 무섭게 경고합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자는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계 14:10~11).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진 자들은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10)고 기록되어 있고, 그 못에 들어갈 사람들의 목록 맨 앞자리에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계 21:8)이 분명히 올라 있습니다.
여러분, 곰곰이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끓는 물에 손을 살짝 데기만 해도 우리는 비명을 지르고, 그 화끈거림 때문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화상 병동에 입원한 환자들이 붕대를 갈 때마다 견디는 고통은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조차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이지요. 그런데 지옥은 손끝 하나가 아니라 온몸이, 몇 초가 아니라 영원히, 꺼지지 않는 유황불 속에서 불타는 곳입니다. 의식은 또렷하게 깨어 있는데 고통은 단 1초도 쉬지 않고, 기절하거나 죽어서 그 고통에서 벗어날 길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고문도 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셈이지요.
더 무서운 것은 그 고통에 ‘끝’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쉬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지구를 덮을 만큼 거대한 모래산이 있고, 새 한 마리가 천 년에 한 번씩 날아와 모래알 하나를 물어 간다고 해 봅시다. 그 새가 모래산을 다 옮기는 데 걸리는 시간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어떤 숫자보다도 깁니다. 하지만 그 모래산이 다 옮겨진 그날에도, 지옥의 고통은 이제 막 시작된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영원에서 아무리 큰 숫자를 빼도 영원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기 때문이지요.
천 년을 불타고 나면 끝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만 년, 백만 년, 십억 년이 흘러도 고통은 단 1초도 줄어들지 않고, 탈출구도 없고, 다시 기회를 얻을 수도 없습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들은 대답처럼, 그곳과 이곳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눅 16:26) 아무도 건너갈 수 없지요.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지옥이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죽은 사람이 영원히 머물게 될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하나님을 기준으로 파스칼의 내기를 표 하나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 나의 선택 | 하나님이 계신다면 | 하나님이 안 계신다면 |
|---|---|---|
| 믿는 쪽에 건다 | 영원한 생명(+∞) | 작고 유한한 손실(또는 이득) |
| 믿지 않는 쪽에 건다 | 지옥의 유황불 속에서 영원히 의식하며 받는 끝없는 고통(−∞) | 작고 유한한 이득 |
이 표가 무엇을 뜻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많은 사람이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을 가장 무난하고 중립적인 선택지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죽으면 끝’이라는 것은 믿지 않는 쪽에 건 사람이 바랄 수 있는 ‘최선의 시나리오’일 뿐입니다. 성경이 사실이라면 믿지 않는 쪽의 결과는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유황불 속에서 영원히 불타는 끝없는 고통입니다. 한쪽은 영원한 기쁨이고 다른 한쪽은 영원한 고통이니, 두 선택지의 차이는 무한에 무한을 더한 만큼 벌어지는 셈이지요. 수학자 파스칼이 이 문제를 그토록 진지하게 붙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걸린 것이 무한한 고통이라면, 단 1%의 가능성도, 아니 100만분의 1의 가능성도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것이지요.
파스칼 자신도 이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회의론자의 독백을 빌려,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면 ‘영원히 소멸하든지, 아니면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떨어지든지’ 둘 중 하나라고 썼습니다 [1]. 앞에서 본 것처럼 ‘우리와 천국 또는 지옥 사이에는 생명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라고도 했지요 [1].
결국 지옥 가기 싫으면 믿으라는 협박 아닌가? 겁을 줘서 사람을 끌어들이는 건 비겁한 거지.
이 반론에는 앞의 독이 든 물 이야기가 그대로 답이 됩니다. 물에 독이 들었다고 알려 준 사람을 두고 ‘나를 협박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불이 난 건물 안에서 ‘빨리 나오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는 소방관을 두고 ‘겁을 준다’고 화를 내는 사람도 없지요. 위험이 클수록 경고는 더 크고 더 다급해지는 법입니다. 경고가 거짓이라면 쓸데없이 겁을 준 셈이 되겠지만, 경고가 사실이라면 그것은 협박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친절입니다. 그러니 따져야 할 것은 경고하는 말투가 아니라, 그 경고가 ‘사실’이냐 아니냐이지요. 예수님이 성경 어느 누구보다 지옥을 자주, 그리고 무섭게 경고하신 것도 사람들을 겁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아무도 가지 않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죽음 이후의 심판이 실제로 있는지는 다음 편부터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어느 신에게 걸어야 하는가라는 반론
- 신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닌데, 내기가 성립하기는 하는가?
- 세상의 모든 종교와 상상 속의 신을 다 같은 무게로 놓아야 하는가?
- 이 반론은 결국 무신론을 돕는가, 아니면 증거 검토를 요구하는가?
파스칼의 내기에 대해 가장 많이 나오고, 학계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반론이 있습니다 [3]. 바로 ‘많은 신 반론’입니다. 그 생각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세상에 종교가 하나뿐인가? 이슬람교에도 지옥이 있고, 다른 종교에도 저마다의 신이 있잖아. 기독교의 하나님에게 걸었는데 알고 보니 다른 신이 진짜면 어쩔 건데? 그럼 파스칼의 계산은 다 쓸모없어지는 거 아냐?

이 반론은 역사가 오래되었습니다.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는 1746년에 ‘이맘(이슬람 지도자)도 똑같은 방식으로 추론할 수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3]. 1966년 제임스 카질(James Cargile)은 『Philosophy』에 실은 논문 「Pascal’s Wager」에서 한발 더 나아가, 머릿속으로 신을 얼마든지 지어낼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10]. 하예크의 설명에 따르면, 카질은 실수(實數) 하나하나마다 그 수를 떠올리기를 무엇보다 좋아하는 신을 하나씩 상상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3]. 그렇게 따지면 신은 무한히 많아지지요.
충분히 진지하게 다룰 만한 반론입니다. 하지만 이 반론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이것이 상대방이 원하는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이 반론은 무신론을 살려 주지 못합니다. 영원한 상과 벌을 말하는 종교가 여러 개라는 사실은 ‘어느 쪽이 참인가’를 더 열심히 따져 봐야 한다는 뜻이지, ‘아무것도 믿지 않는 쪽’이 안전하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영원한 심판을 말하는 종교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참이라면, 아무것도 믿지 않은 사람은 그 모든 경우에 지는 쪽에 서게 되지요. 식당에서 ‘이 물에 독이 있다’는 사람과 ‘저 물에 독이 있다’는 사람이 함께 나타났다면, 합리적인 사람은 두 잔을 다 벌컥벌컥 마시지 않습니다. 어느 말이 맞는지 확인부터 하겠지요.
둘째, 모든 ‘신 후보’가 같은 무게를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크레이그는 2012년의 답변에서, 의사결정 이론에서는 가능성이 극히 작은 경우를 무시해도 된다고 지적합니다 [9]. 예를 들어 ‘자기를 믿는 사람만 골라 지옥에 보내는 신’이나 ‘어떤 숫자 하나를 사랑하는 신’은 머릿속으로 지어낼 수는 있어도, 그것을 지지하는 역사도, 증인도, 문서도 없습니다. 근거라고는 ‘상상할 수 있다’는 것 하나뿐인 가설은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이지요. 그런 후보까지 모두 같은 저울에 올려야 한다면, 우리는 일상에서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을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파스칼의 내기를 비판한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조차 같은 구분을 썼습니다. 그는 1897년 책 『The Will to Believe』에서, 듣는 사람에게 전혀 현실성이 없는 가설을 ‘죽은 가설’이라 부르고, 그런 가설로는 파스칼의 논리를 써 봐야 아무도 움직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11]. 살아 있는 선택지와 죽은 선택지를 구분하는 것은 비판자들도 인정하는 상식이라는 셈이지요.
셋째, 그렇다면 남는 선택지는 결국 ‘증거’로 가려야 합니다. 크레이그는 파스칼이 부활 같은 기독교의 증거를 통해 선택지를 기독교 유신론과 자연주의 둘로 좁혔다면, 내기는 문제없이 성립한다고 말합니다 [9]. 실제로 파스칼 자신도 내기 단장에서 회의론자가 ‘카드의 앞면을 볼 방법은 없느냐’고 묻자 ‘있습니다, 성경과 그 밖의 것들’이라고 답합니다 [1]. 내기는 처음부터 증거를 대신하려고 만든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성경의 하나님은 ‘여러 신 가운데 하나’로 자리를 나눠 갖기를 거부하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셨고, 사도들은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고 선포했습니다. 동시에 기독교는 자신의 진위를 역사적 사실 하나에 통째로 걸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고전 15:14). 많은 신 반론은 내기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증거 앞으로 데려다 놓습니다. 여러 종교의 주장을 공정한 기준으로 비교하는 작업은 이 시리즈의 뒷부분에서 따로 다루겠습니다.
믿음은 계산으로 고를 수 없다는 반론
- 사람이 믿기로 마음먹는다고 믿어지는가?
- 파스칼은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답했는가?
- 우리가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이번에는 좀 더 근본적인 반론입니다.
계산해 보니 믿는 게 이득이라고 치자. 그런데 믿음이 무슨 스위치야? ‘지금부터 믿어야지’ 한다고 믿어지냐고. 마음에서 믿기지 않는 걸 어떻게 억지로 믿어?
맞는 말입니다. 믿음은 스위치처럼 켜고 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파스칼은 바로 이 반론을 『팡세』에 직접 적어 두었습니다. 내기 논증을 다 들은 상대방이 이렇게 하소연하지요. “나는 손이 묶이고 입이 막혀 있습니다. 나는 믿을 수 없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나더러 어쩌라는 것입니까?” [1]

파스칼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믿지 못하는 이유가 증거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정념’, 곧 마음을 붙잡고 있는 욕망 때문일 수 있으니, 증거를 더 쌓기보다 그 정념을 줄이는 데 힘쓰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먼저 그 길을 걸어간 사람들에게서 배우라고 권합니다 [1]. 파스칼의 누이 자클린도 그런 길을 택해 위 그림의 포르루아얄 수도회에 들어갔습니다 [2].
물론 파스칼은 가톨릭 신자였기에, 그 방법으로 성수를 쓰고 미사를 드리는 것을 예로 들었습니다 [1]. 개신교인인 제가 볼 때 사람을 믿음으로 이끄는 것은 그런 예식이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읽고 따져 보며, 하나님께 정직하게 구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3). 사도행전의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의 설교를 듣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칭찬을 받았지요.
여기서 꼭 구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의지로 곧바로 고를 수 없는 것은 ‘믿음 자체’이지만, 의지로 얼마든지 고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확인하는 행동’입니다. 앞의 예로 다시 돌아가 볼까요? 여러분은 ‘이 물에 독이 있다고 믿어야지’라고 마음먹는다고 해서 그렇게 믿어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물을 마시지 않고 내려놓은 뒤 검사를 맡기는 것은 지금 당장 선택할 수 있지요.
파스칼의 내기가 여러분께 요구하는 것은 ‘억지로 믿으라’가 아니라 ‘진지하게 찾아보라’입니다. 성경을 직접 펴 보고, 기독교를 지지하는 증거와 반대하는 증거를 공정하게 저울질해 보는 일은, 오늘 이 자리에서 누구나 선택할 수 있는 일입니다. 파스칼이 무관심한 사람과 온 힘을 다해 찾는 사람을 그토록 날카롭게 구분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
하나님이 계산된 믿음을 받으시는가라는 반론
- 손익을 따져서 믿는 믿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 두려움이나 자기 이익에서 출발한 믿음은 가짜인가?
- 구원받는 믿음과 내기의 계산은 어떻게 다른가?
내기에 대해 가장 날카로운 도덕적 반론을 꼽으라면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천국 가려고 계산기 두드려서 믿는 척하면, 전지전능한 신이 그걸 모를까? 내가 신이라면 그런 계산적인 신자는 오히려 쫓아낼 것 같은데.

이 반론을 가장 유명하게 남긴 사람이 앞에서 소개한 윌리엄 제임스입니다. 그는 『The Will to Believe』에서, 이런 기계적인 계산 끝에 고른 믿음에는 믿음의 참된 알맹이가 빠져 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신의 자리에 있다면 이런 신자들을 영원한 상에서 잘라 내는 일에 특별한 기쁨을 느낄 것이라고까지 말했지요 [11].
저는 이 반론의 절반에 기꺼이 동의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보시는 분이고, 겉으로만 믿는 척하는 것은 구원받는 믿음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도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라고 말합니다. 머리로 ‘신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귀신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지요. 구원받는 믿음은 자기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며, 그 믿음은 거룩하게 변화된 삶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 반론은 ‘믿음의 출발점’과 ‘믿음의 완성’을 혼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파스칼의 내기는 구원받는 믿음 그 자체가 아닙니다.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처음 돌려세우는 ‘계기’이지요.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의 파스칼 항목도, 내기의 확률 계산이 믿지 않는 사람에게 곧바로 믿음을 만들어 줄 수는 없다고 설명합니다 [2]. 내기는 문을 가리킬 뿐이고, 그 문을 지나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쉬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구조대원이 내민 손을 잡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구조대원을 깊이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그냥 살고 싶어서입니다. 그런데 ‘나를 사랑해서 잡은 손이 아니니 놓겠다’고 말하는 구조대원은 세상에 없습니다. 오히려 살아난 사람은 나중에 그 구조대원에게 평생 감사하며 살게 되겠지요. 물론 이 비유에도 한계는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손만 잡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죄를 인정하고 돌이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처음 동기가 자기 이익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을 내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정확히 같습니다.
성경 자체가 이 출발점을 정당하게 사용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 16:26)라고 손익을 따져 보라고 하셨고,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눅 12:5)고 경고하셨습니다. 제자가 되려는 사람에게는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눅 14:28)라고 물으셨지요. 예수님은 ‘계산하지 말고 믿으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제대로 계산해 보라’고 하신 셈이지요.
탕자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을 나간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가기로 마음먹은 첫 이유는 효심이 아니라 배고픔이었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 15:17).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 동기를 따지지 않고 달려가 아들을 끌어안았습니다. 히브리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상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고 나아오는 것 자체가 믿음의 일부라는 말이지요.
두려움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출발점이 될 수 있지만, 머무를 곳은 아닙니다. 성경은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일 4:18)라고 말합니다. 지옥이 두려워 하나님을 찾기 시작한 사람이, 십자가에서 자기 죄값을 대신 치르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면 더 이상 계산 때문에 믿지 않게 됩니다. 사랑 때문에 믿고 따르게 되지요. 내기의 결론부에서 파스칼이 이 논증을 쓴 사람은 그 앞뒤로 무릎 꿇고 기도한 사람이라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1].
이성을 버리라는 말인가라는 반론
- 내기는 증거 없이 믿으라는 요구인가?
- 증거가 충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믿지 말아야 하는가?
- 파스칼은 이성과 믿음의 관계를 어떻게 보았는가?
마지막으로, 이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들이 던질 법한 반론이 남아 있습니다.
결국 증거가 없으니까 이득 계산으로 밀어붙이는 거잖아. 증거도 없이 손익만 따져서 믿는 건 지적으로 정직하지 못한 거 아냐?

이 반론의 대표 주자는 케임브리지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윌리엄 킹던 클리퍼드(William Kingdon Clifford)입니다. 그가 1877년 『Contemporary Review』에 발표한 「The Ethics of Belief」는 이 논쟁의 고전으로 꼽힙니다 [12]. 제임스가 인용한 클리퍼드의 문장은 이렇습니다. “충분하지 않은 증거를 근거로 무엇이든 믿는 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잘못이다.” [11] 얼핏 생각하면 굉장히 합리적이고 타당한 원칙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반론은 두 가지를 놓치고 있습니다. 첫째, 파스칼의 내기는 ‘증거 없이 믿으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파스칼은 카드의 앞면을 볼 방법으로 성경과 그 밖의 증거를 가리켰고 [1], 내기는 그 증거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게 만드는 ‘동기’의 역할을 할 뿐입니다. 파스칼 자신도 “두 가지 극단이 있다. 이성을 배제하는 것, 그리고 이성만 인정하는 것”(『팡세』, 브랑슈비크 판 253번)이라고 썼습니다 [1]. 이성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할 일을 끝까지 하라는 것이지요.
둘째, 현실의 중요한 결정은 언제나 100% 확실한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내려집니다. 독이 든 물 앞에서 ‘독이 있다는 충분한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마시겠다’고 고집하는 사람을 우리는 이성적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결과가 치명적인 문제일수록, 증거를 기다리며 판단을 미룰 것이 아니라 증거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는 것이 이성적인 태도이지요.
이 점은 기독교 신앙의 본래 모습과도 정확히 맞아떨어집니다. 성경은 맹목적인 믿음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살전 5:21)라고 명령하고, 믿는 사람에게는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벧전 3:15)라고 요구합니다. 사도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그냥 좋은 마음가짐’이 아니라, 사실이면 전부이고 거짓이면 아무것도 아닌 ‘사실의 문제’로 자신을 내놓았던 것이지요.
철학자 제프 조던(Jeff Jordan)이 2006년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에서 낸 『Pascal’s Wager: Pragmatic Arguments and Belief in God』도 바로 이 ‘믿음의 윤리’ 문제를 한 장을 따로 들여 다루고, 많은 신 반론과 무한 효용 문제까지 차례로 검토했습니다 [13]. 내기를 둘러싼 논쟁은 ‘이성이냐 신앙이냐’의 싸움이 아니라, 불확실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가장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느냐는 문제라는 것이지요.
내기가 가리키는 곳은 증거
- 파스칼의 내기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증명하는가?
- 그렇다면 내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는가?
- 이제 우리는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가?
복잡한 것 같지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결과가 치명적인 경고라면, 가능성이 낮아 보여도 확인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성경이 경고하는 결과는 단순히 천국을 놓치는 정도가 아니라, 믿지 않는 죄 때문에 유황불 속에서 영원히 불타며 끝없는 고통을 받는 지옥입니다. 그리고 파스칼의 내기가 보여 주듯, 걸린 것의 크기가 이처럼 무한히 차이 날 때는 하나님이 계실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한 이 문제를 외면하는 것이 가장 불리한 선택이 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파스칼의 내기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내기는 증거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내기는 우리가 증거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이유를 줄 뿐입니다. 많은 신 반론도, 믿음은 의지로 고를 수 없다는 반론도, 계산된 믿음에 대한 반론도, 이성을 버리라는 말이냐는 반론도, 결국 모두 같은 곳을 가리킵니다. 바로 ‘그렇다면 증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지요.
여러분, 사람들은 집 한 채를 살 때도 등기부등본을 몇 번씩 떼어 보고, 수술 하나를 받을 때도 병원과 의사를 몇 곳씩 알아봅니다. 길어야 몇십 년 쓸 집과 몸을 위해서도 그렇게 꼼꼼하게 따지지요. 그렇다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고통이 걸린 문제를 단 한 번도 진지하게 따져 보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무모함입니다. 기독교가 참인지 거짓인지를 깊이 고민하고 치밀하게 검증하는 일, 곧 ‘변증’은 몇몇 신학자의 취미가 아니라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반드시 거쳐야 할 생존의 문제인 것이지요.
그래서 이 시리즈는 이제부터 그 증거를 하나씩 앞에 놓고 까탈스럽게 따져 보려고 합니다. 다음 편에서는 먼저 죽음과 심판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정면으로 다루고, 이어서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대표적인 이유들을 정리할 것입니다. 그 뒤로 신의 존재를 가리키는 논증, 성경 사본의 신뢰성, 예수의 부활, 성취된 예언을 차례로 검토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꼭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내기에는 마감 시간이 있습니다. 성경은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 27:1)고 말합니다. 창고를 더 크게 지을 궁리만 하던 부자에게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눅 12:20)라고 하셨지요. 파스칼의 말처럼 우리와 영원 사이에는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생명 하나가 놓여 있을 뿐입니다. 그 생명이 끊어지는 순간 내기는 끝나고, 그다음에는 되돌릴 기회가 단 한 번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식당의 그 물 한 잔을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경고를 들은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일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설마’ 하며 마셔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합리적인 일은, 그 경고가 사실인지 지금 바로 확인하는 것이지요.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회의론자에게 드리는 7가지 질문
- 식당에서 누군가 물에 독이 들었다고 경고한다면, 여러분은 확인도 하지 않고 그 물을 마시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영원이 걸린 경고 앞에서는 왜 다른 기준을 쓰십니까?
- 판단을 미루는 것이 정말 ‘중립’입니까? 배가 이미 바다 위를 달리고 있는데도 아무 데도 가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 하나님이 계실 가능성이 0이라고 확신할 근거를 가지고 계십니까? 0이 아니라면, 무한한 결과에 곱해진 그 가능성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습니까?
-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은 믿지 않는 쪽에 건 사람이 바랄 수 있는 최선의 경우일 뿐입니다. 그 생각이 틀렸다면 유황불 속의 끝없는 고통이 기다리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 많은 신 반론이 옳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믿지 않을 이유입니까, 아니면 어느 주장이 참인지 더 열심히 확인할 이유입니까?
- 믿음을 억지로 만들 수는 없더라도, 성경을 직접 읽고 증거를 따져 보는 일은 오늘 당장 선택할 수 있지 않습니까?
- 지금까지 이 문제를 따져 보지 않은 이유는 ‘근거가 부족해서’였습니까, 아니면 ‘관심이 없거나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였습니까?
증거는 차고도 넘칩니다. 이제 판단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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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스칼 초상(1670) | Portrait de Blaise Pascal (MARQ 999.3.1).jpg | 작자 미상 | CC BY-SA 4.0 |
| 파스칼 묘비 | Blaise Pascal tombe.jpg | ManoSolo13241324 | CC BY-SA 4.0 |
| 『팡세』 자필 원고 | Pensées, Pascal, Manuscrit autographe, entre 1656 et 1662, BnF, Manuscrits - Exposition Blaise Pascal à la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jpg | ActuaLitté | CC BY-SA 2.0 |
| 파스칼린 | Arts et Metiers Pascaline dsc03869.jpg | David Monniaux | CC BY-SA 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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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팡세』 자필 원고의 다른 면 | Pensées, Pascal, Manuscrit autographe, entre 1656 et 1662, BnF, Manuscrits - Exposition Blaise Pascal à la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2).jpg | ActuaLitté | CC BY-SA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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